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하치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모하치 전투에서, 2만 5천에서 3만여 명의 헝가리군 가운데 3분의 2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한편 오스만군은 1,500여 명의 사상자만을 내며 압승했다. 하지만 쉴레이만 1세는 여세를 몰아 헝가리의 수도 부더로 진격하는 대신 며칠 동안 모하치에 야영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제아무리 헝가리의 왕도 죽었다지만 고조부인 [[무라트 2세]] 시대부터 수십 년 동안 오스만에 저항했던 강국 헝가리가 이걸로 끝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모하치 전투는 헝가리로서는 국가의 운명을 건 대전투였지만, 오스만의 입장에서는 적의 기병들이 단체로 [[반자이 어택]]을 시전한 싸움이었을 뿐이었다. [[공명의 함정|헝가리의 함정]]인가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 사실 [[바르나 전투]] 당시 십자군의 경우만 봐도 그렇지만 14세기 후반쯤 들어가면 [[동로마 제국]]에 망조가 들어서 콘스탄티노플을 지키는 데에 급급한 처지였고, [[불가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 등 짜잘한 공국들은 애초에 체급 자체가 오스만 제국과 비교가 안 되었기에 기본적으로 동남부 유럽의 대오스만 전선에서 해상의 주축이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면 육상에서 탱킹은 '''헝가리를 중심으로 뭉친''' 발칸 반도의 정교회와 가톨릭계 기독교 연합군이었다. 사실 모하치에서 털렸던 만큼 전술적인 레벨에선 오스만 제국도 야전에서, 공성전에서 15세기 후반 ~ 16세기 초반에 헝가리에게 손실 교환비 3:1, 5:1 이따위로 못지 않게 탈탈 털린 전투들도 적지 않았다. 차이점은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전투 한 번에 병사 1~2만 잃은 거야 '''×발 내년에 다시''' 하고 넘어가 버리면 되는 문제[*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동쪽으론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비롯한 사방이 적이라 한 전선에서의 공백이 제국 전체에게 치명적인 연쇄작용을 일으킬 위험성을 항상 끼고 있어서 오스만 제국도 그렇게 속 편하게 인력을 막 버릴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야전에서 오스만 제국의 숫적 우위는 [[몰다비아 공국]]·[[왈라키아 공국]], 헝가리 점령 이후에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에르데이 공국]]·[[크림 칸국]] 등 제후국의 군대도 막 끌어모아 확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제국이라고 10만, 20만이 우습게 호주머니에서 꺼낼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프랑스 왕국]]이나 [[합스부르크 제국]] 등의 강대국을 제외한 헝가리를 비롯한 대부분 유럽 왕국들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의 여유가 있었다.]였지만, 상술한 남슬라브나 블라흐계 정교회 공국들 입장에서는 그냥 나라 전체가 한 방에 훅 가는 수준이었고[* [[코소보 전투]]가 딱 이랬다. 전투 자체는 둘 다 군주가 전사할 정도의 양패구상인데 대국적인 결과는 뒷심이 심하게 부족했던 세르비아의 멸망이었다.], 헝가리쯤 되는 나름 강대국도 한 서너 번 겪으면 복구 불가능한 수준의 손실이었다. 결국 쉴레이만 1세 입장에서 헝가리 정복과 복속은 이런 차원에서 큰 장애물 경기 하나 끝낸 셈이었으니 '이게 생시인가'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부더에 입성한 쉴레이만 1세는 수비군은커녕 주민들도 진작에 피신하고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뭔가 찜찜했던지 부더를 제국의 영토에 합병하기는커녕 그대로 철군하는 것을 선택했다. 여담으로 당시 부더의 주민들 대부분이 도주하고 유대인들만 남아있었는데, 그들이 항복 사절로 파견한 이의 이름이 쉴레이만과 같은 어원인 살라몬이었다. 한편 러요시 2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한 탓에 자녀를 남기지 못하고 죽었으며 이에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계 [[야기에우워 왕조]]는 단절되었다. 이에 러요시 2세의 누나와 결혼한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 황제 카를 5세의 동생이기도 하다.]가 러요시 2세가 생전에 했던 약속 및 혈연 관계를 바탕으로 헝가리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러요시 2세가 왕 노릇한 다른 나라들인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는 재빠르게 페르디난트 1세를 추대한 반면, 헝가리 귀족들의 의견은 양분되었다. 일단 헝가리 귀족 회의는 페르디난트 1세를 새 국왕으로 인정했지만, 동부 에르데이를 중심으로 한 귀족들은 이에 반발하여 당시 헝가리의 대표적인 귀족으로 인망을 얻고 있었고 모하치 전투에서 에르데이를 수비했던 서포여이 야노시를 [[야노시 1세]]로 옹립했다. 그러자 페르디난트 1세의 합스부르크군이 헝가리로 진주하여 야노시를 격퇴하고 헝가리를 접수했다.[* 이후 헝가리는 1918년 10월 31일에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에게서 독립할 때까지 392년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다.] 페르디난트 1세에게 패배하여 달아난 야노시는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를 찾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의 신하가 되겠노라고 제안했다. 야노시의 제안을 받아들인 쉴레이만 1세는 1529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향하여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군을 격퇴하고 마침내 합스부르크의 수도 빈을 포위([[1차 빈 공방전]])하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야노시는 이후에도 어느 정도의 세력을 보유했으며, 헝가리인들은 야노시와 그의 아들 야노시 2세(재위 1540-1551)까지는 헝가리의 왕으로 인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